재즈는 곡의 형식이나 곡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연주 스타일 혹은 연주 그 자체에 대한 호칭이라는 점에 재즈의 본질이 있다. 즉 클래식의 경우에는 작곡된 곡이나 작곡가가 항상 초점이 되지만 재즈는 연주자가 항상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재즈는 랙타임, 블루스, 그 외의 당대의 미국 대중음악에서 발전된 흑-백 혼합의Afro-American 가장 미국적인 음악 양식이다. 그것은 흑인 블루스로부터 즉흥적인 연주와선창과 후창Call & response 같은 재즈의 중요한 요소들을 물려 받아 다양하게 발전시켰으며 백인음악으로부터는 관악기와 건반악기, 그리고 현악기와 타악기에 이르는 연주 악기와 그들의 화성학을 전수받아 독특한 재즈의 문법으로 발전시킨다. 즉흥성이야말로 재즈의 가장 핵심이랄 수 있는데 재즈의 예측불허의 즉흥연주는 블루스의 정서를 결핍한 백인 식자층(유럽의 청중까지 포함한)의 관심을 즉각적으로 끌게 된다.
킹올리버,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즈의 전도사로 부상하는 루이 암스트롱을 낳은 뉴올리언즈의 소규모 편성cambo 재즈가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대형 댄스홀을 배경으로 수십명의 재즈 오케스트라 편성으로 확대되면서 재즈는 가장 대중적인 미국의 음악 양식으로 급상한다.초기 메인스트림 재즈는 스윙 빅밴드가 연주하는 댄스 음악이었다. 이 빅밴드의 재즈 시대에 이르러 편곡에 능한 백인 밴드 리더가 득세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이지만, 그러나 곧 댄스적 요소는 후위로 사라지고 40년대 중반에 이르러 찰리 파커나 버드 파웰, 마일스 데이비스 같은 흑인 개척자들에 의한 도전적인 즉흥 연주가 새로운 모던 재즈의 역사를 개막시킨다. 장르적 진보가 이루어지면서 재즈는 비밥의 빠르고 강한 리듬, 쿨 재즈의 느긋하고 감미로운 하모니, 신경질적이고 무조(無調)적인 프리 재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타일로 진화한다. 이들 모두를 묶는 것은 블루스라는 토대와 그룹 연주 그리고 예측 불허의 즉흥연주를 지녔다는 점이다.
60년대 후반엔 재즈는 마일스 데이비스에 의해 강력한 영향력을 보유한 록 음악의 일렉트릭적 요소와 결합하면서 퓨전을 탄생시키며 재즈의 경계선을 더욱 확장시킨다. 비록 20세기에 들어서서 탄생한 신조류지만 약 육십년 동안 재즈는 폭발적인 진화의 길을 걸으며 다양한 하위 장르들을 생성시키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재즈 혹은 재즈적 편성의 악단 문화는 이미 1930년대 중반 식민지 시대의 한국 음반산업에 의해 수용되었고, 비록 본토보다는 지배자인 일본 스타일이라는 한계가 있었지만 박단마의 [나는 열아홉살이에요] 같은 스윙 스타일의 노래를 히트시키며 대중음악 연주의 핵심적인 요소로 자리잡는다. 이러한 밴드 문화는 전쟁 이후 한국의 대중음악계를 지배하게 되는 미8군 무대로 그대로 이어져 활황을 이루지만 주류 대중문화로 진출하기엔 많은 한계가 있었다. 즉 60년대를 풍미한 이봉조나 길옥윤, 그리고 손석우 같은 인물들은 재즈 악단의 리더 이전에 스탠더드 팝의 작곡가로서의 명성이 더 강했으며 악단 역시 재즈 본연의 즉흥 연주보다는 보컬 팝의 반주 기능이 더 우선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8군 그룹에서 분리되어 나온 야누스같은 정통 재즈를 추구하고자 하는 집단은 철저히 소외된 상태에서 자신들의 음악적 신념을 지켜야 했다.
한국에서의 재즈가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것은 색소폰 주자 이정식을 필두로 해외 유학파들이 속속 귀국하면서 비주류 재즈 씬을 형성하기 시작한 199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한국의 재즈는 이판근과 신관웅 같은 1세대 베테랑 그룹에서 강태환과 김대환 같은 프리 재즈 연주자들, 그리고 이정식 이후 한충완과 김광민 혹은 이주한, 잭리 같은 중견 세대로 이월되면서 조금씩 대중적 지평을 넓혀가고 있는 중이다.
